< 한국불교에 고함 11 >
아기 얼굴이 이미 부처
김 형 효
우리 불자들은 이 세상의 존재방식이 이중적인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부처임을 깨닫기 위하여 멀고 먼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로 깊이 침잠하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다. 봄을 찾기 위하여 온 산하와 들을 찾아 헤맸던 송나라 여류 시인의 시가 말하듯이, 봄은 자기 집안의 나무에 이미 와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 우리가 부처를 찾기 위하여 부처님이 계신 산과 깊은 숲속을 뒤척거리면서 찾아 헤매지만,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을 우리가 잊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가 계신다는 것을 부처님이 여러 번 가르쳐 주셨건만, 우리는 부처님을 늘 고매하고 청아한 구름 밖의 선경(仙境)에서 찾으려 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선경을 찾으려 하는 습성은 우리는 더럽고 부처님은 지극히 깨끗하고 청결한 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지극히 청결하고 지순한 분인 것은 사실이나, 그런 존재방식은 중생의 더러운 존재방식과 이중적인 모습의 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부처님이 되는가? 누추한 중생이 부처가 될 뿐이다. 중생이 부처의 길을 가기 위하여 멀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부처의 모습을 한 중생의 다른 얼굴이 이미 새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음악가로서 지휘자인 카라얀을 참으로 좋아한다. 나는 카라얀의 지휘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카라얀이 음악을 지휘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초대받아서 온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음악의 안에서 음악이 스스로 빚어서 된 사람인 양 그런 착각을 한다. 이런 착각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을 볼 때에도 느껴진다. 석공이나 조각가가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그 불상을 새겨놓은 것이 아니라, 오랜 억겁의 세월동안 바위의 염원이 바위 속에서 아롱져서 바위가 스스로 부처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충남 서산에 있는 ‘백제의 미소’를 상상해 보자. 그 미소는 억겁의 세월 동안 서서히 바위 속에서 어떤 염원이 새겨져 꽃핀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편으로 중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부처이다. 우리가 법당에서 정좌하고 앉아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미 나는 내가 바라보는 부처님이 되어서 변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조금 전까지 느꼈던 중생의 망상들을 바라보면서 부처의 안목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을 응시하곤 한다. 부처의 안목으로 나를 응시하는 시간이 매우 짧은 까닭은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습이 너무 짙어서 단기간에 부처의 모습을 재현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부처님이 석가모니불만 계신 것이 아니라, 많은 다른 부처님들이 화신불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법신의 부처님은 원리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이 다 부처님임을 말한다. 보신의 부처님은 공짜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덕의 힘으로 부처님이 그와 같이 오신 것이다. 화신의 부처님은 부처님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하여 화현한 것을 말한다.
선악도 상호 대립적인 두개의 영역이 아니라, 선악도 하나의 성향이 이중성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읽어야 한다. 육조 혜능조사가 ‘不思善 不思惡’(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다. 오직 선만을 행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그 뉘앙스에서 다르다. 선이 무엇임을 알기 위하여 악이 무엇인가를 또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부처가 되기 위하여 선도 악도 모르는 상태가 최고의 경지임을 위의 경구가 암시하고 있다. 간난 아기를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아기마음을 가져본다. 아기 얼굴을 보면서 음모와 흉함을 발의할 것인가? 불가능하다. 아기 얼굴이 바로 부처님이다.
< 한국불교에 고함 11 >
아기 얼굴이 이미 부처
김 형 효
우리 불자들은 이 세상의 존재방식이 이중적인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부처임을 깨닫기 위하여 멀고 먼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로 깊이 침잠하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다. 봄을 찾기 위하여 온 산하와 들을 찾아 헤맸던 송나라 여류 시인의 시가 말하듯이, 봄은 자기 집안의 나무에 이미 와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 우리가 부처를 찾기 위하여 부처님이 계신 산과 깊은 숲속을 뒤척거리면서 찾아 헤매지만,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을 우리가 잊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가 계신다는 것을 부처님이 여러 번 가르쳐 주셨건만, 우리는 부처님을 늘 고매하고 청아한 구름 밖의 선경(仙境)에서 찾으려 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선경을 찾으려 하는 습성은 우리는 더럽고 부처님은 지극히 깨끗하고 청결한 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지극히 청결하고 지순한 분인 것은 사실이나, 그런 존재방식은 중생의 더러운 존재방식과 이중적인 모습의 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부처님이 되는가? 누추한 중생이 부처가 될 뿐이다. 중생이 부처의 길을 가기 위하여 멀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부처의 모습을 한 중생의 다른 얼굴이 이미 새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음악가로서 지휘자인 카라얀을 참으로 좋아한다. 나는 카라얀의 지휘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카라얀이 음악을 지휘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초대받아서 온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음악의 안에서 음악이 스스로 빚어서 된 사람인 양 그런 착각을 한다. 이런 착각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을 볼 때에도 느껴진다. 석공이나 조각가가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그 불상을 새겨놓은 것이 아니라, 오랜 억겁의 세월동안 바위의 염원이 바위 속에서 아롱져서 바위가 스스로 부처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충남 서산에 있는 ‘백제의 미소’를 상상해 보자. 그 미소는 억겁의 세월 동안 서서히 바위 속에서 어떤 염원이 새겨져 꽃핀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한편으로 중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부처이다. 우리가 법당에서 정좌하고 앉아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미 나는 내가 바라보는 부처님이 되어서 변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조금 전까지 느꼈던 중생의 망상들을 바라보면서 부처의 안목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을 응시하곤 한다. 부처의 안목으로 나를 응시하는 시간이 매우 짧은 까닭은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습이 너무 짙어서 단기간에 부처의 모습을 재현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부처님이 석가모니불만 계신 것이 아니라, 많은 다른 부처님들이 화신불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법신의 부처님은 원리적으로 모든 존재자들이 다 부처님임을 말한다. 보신의 부처님은 공짜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덕의 힘으로 부처님이 그와 같이 오신 것이다. 화신의 부처님은 부처님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하여 화현한 것을 말한다.
선악도 상호 대립적인 두개의 영역이 아니라, 선악도 하나의 성향이 이중성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읽어야 한다. 육조 혜능조사가 ‘不思善 不思惡’(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 것)이라고 말했다. 오직 선만을 행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그 뉘앙스에서 다르다. 선이 무엇임을 알기 위하여 악이 무엇인가를 또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부처가 되기 위하여 선도 악도 모르는 상태가 최고의 경지임을 위의 경구가 암시하고 있다. 간난 아기를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아기마음을 가져본다. 아기 얼굴을 보면서 음모와 흉함을 발의할 것인가? 불가능하다. 아기 얼굴이 바로 부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