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불교에 고함 12 >
문무대왕의 해중릉은 성지(聖地)다.
김 형 효
일상생활에 젖어 살게 되면, 누구든지 모든 이들은 다 타성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예부터 영웅호걸들은 그 일상을 거부하기 위하여 모험을 감행한다. 그 모험들은 대부분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여 우리들의 긴장감을 항시 자극한다. 그 긴장감의 자극은 19세기에는 서구인들의 동양탐사를 감행하게 하였고, 20세기에는 지구인들의 우주탐사를 유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우주탐사를 그리워하는 관심의 백미(白眉)는 미국 우주인이 병으로 죽게 되었을때에, 자기의 몸을 달나라에 안착시켜 달라는 유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도 그 시신이 달나라에 놓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겠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한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는 지금도 17세기에 서양인들이 범선을 타고 세계를 누비고저 한 모험심을 크게 평가한다. 늘 고향 땅에 안주해 보아야 큰 자극이 없이 일상에 젖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의식일 진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심은 고향에 젖은 멍청한 나의 의식을 일깨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양가적인 의미를 지닐 진 대, 고향도 역시 그러한 구조를 면하지 못한다. 고향은 늘 먹던 그 밥에 그 나물을 의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고향은 설익은 세상에 대한 불안보다 오히려 잘 아는 삶의 분위기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나타낸다.
바다를 누비던 서양인들의 장례식을 영화를 통하여 본 적이 있다. 시신을 배에 싣고 계속 다닐 수가 없으니까 배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시신을 바다 속으로 수장하는 장면을 여러 번 나는 보았다. 해저에 잠긴 시신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파괴된 관과 함께 고기밥이 되어 사라지는 운명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모험심은 고착된 사고방식을 파괴하는 창조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은 불안의 연속이어서 안정감의 결여이기도 하다. 종교가 왜 미지의 땅으로 전법을 떠나는 것일까? 자기가 믿는 진리가 세상의 곳곳에 퍼지는 일이 일어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받게끔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종교의 양적인 팽창은 매우 중요하다. 종교의 힘은 양적인 종교적 팽창에서 크게 힘을 입는다. 몇 소수만이 그 종교를 신봉하는 경우에 그것은 철학의 이론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종교의 힘으로는 어림없다. 그래서 불교의 교주도 설산의 깨달음에서 부터 인도문명의 중심부로 전파하기 위하여 걸음을 옮기셨고, 기독교의 수제자도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의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이런 행적은 종교적 진리의 생리가 고적(孤寂)에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 진리가 대중의 힘을 얻어서 대중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리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종교적 진리가 오로지 대중적인 생리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대중적 지지로 생명을 유지하는 정치와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종교는 대중의 열기로 힘을 얻지만, 종교가 고적한 사색을 멀리하는 경우에 그 종교는 대중의 천박한 수준으로 타락하여 정치적 열기와 힘을 계속유지 하지 못하고 결국 대중의 노리개 깜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늘 창시자의 고독한 각성을 잊지 말아야 하고, 또 동시에 대중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는 늘 이중적인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 그 하나는 창시자의 고적한 영혼을 사색함이요, 또 다른 하나는 대중을 유지함이다.
종교는 늘 두 가지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 하나는 교주의 고적한 영혼의 깊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중의 구원이다. 교주의 고적한 영혼의 깊이를 사색하고 체험하는 곳에서는 철학적 사유가 더없이 필요하고, 대중을 교화하고 선도하는 곳에서는 대중적인 친화력이 더없이 요구된다. 종교는 정치처럼 그 대중적 세력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적 세력을 얻기 위하여 종교는 정치와 유사한 행적을 밟는다. 불교지도자는 교주 석가모니의 철학적 사유를 깊이 이해하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불교를 중흥시켜 온 정치지도자들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예컨대 한국불교가 신라의 문무대왕의 해중 능을 성지로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 한국불교에 고함 12 >
문무대왕의 해중릉은 성지(聖地)다.
김 형 효
일상생활에 젖어 살게 되면, 누구든지 모든 이들은 다 타성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예부터 영웅호걸들은 그 일상을 거부하기 위하여 모험을 감행한다. 그 모험들은 대부분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여 우리들의 긴장감을 항시 자극한다. 그 긴장감의 자극은 19세기에는 서구인들의 동양탐사를 감행하게 하였고, 20세기에는 지구인들의 우주탐사를 유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우주탐사를 그리워하는 관심의 백미(白眉)는 미국 우주인이 병으로 죽게 되었을때에, 자기의 몸을 달나라에 안착시켜 달라는 유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도 그 시신이 달나라에 놓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겠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한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는 지금도 17세기에 서양인들이 범선을 타고 세계를 누비고저 한 모험심을 크게 평가한다. 늘 고향 땅에 안주해 보아야 큰 자극이 없이 일상에 젖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의식일 진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심은 고향에 젖은 멍청한 나의 의식을 일깨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양가적인 의미를 지닐 진 대, 고향도 역시 그러한 구조를 면하지 못한다. 고향은 늘 먹던 그 밥에 그 나물을 의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고향은 설익은 세상에 대한 불안보다 오히려 잘 아는 삶의 분위기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나타낸다.
바다를 누비던 서양인들의 장례식을 영화를 통하여 본 적이 있다. 시신을 배에 싣고 계속 다닐 수가 없으니까 배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시신을 바다 속으로 수장하는 장면을 여러 번 나는 보았다. 해저에 잠긴 시신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파괴된 관과 함께 고기밥이 되어 사라지는 운명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모험심은 고착된 사고방식을 파괴하는 창조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은 불안의 연속이어서 안정감의 결여이기도 하다. 종교가 왜 미지의 땅으로 전법을 떠나는 것일까? 자기가 믿는 진리가 세상의 곳곳에 퍼지는 일이 일어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받게끔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종교의 양적인 팽창은 매우 중요하다. 종교의 힘은 양적인 종교적 팽창에서 크게 힘을 입는다. 몇 소수만이 그 종교를 신봉하는 경우에 그것은 철학의 이론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종교의 힘으로는 어림없다. 그래서 불교의 교주도 설산의 깨달음에서 부터 인도문명의 중심부로 전파하기 위하여 걸음을 옮기셨고, 기독교의 수제자도 죽음을 각오하고 로마의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이런 행적은 종교적 진리의 생리가 고적(孤寂)에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 진리가 대중의 힘을 얻어서 대중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리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종교적 진리가 오로지 대중적인 생리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대중적 지지로 생명을 유지하는 정치와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종교는 대중의 열기로 힘을 얻지만, 종교가 고적한 사색을 멀리하는 경우에 그 종교는 대중의 천박한 수준으로 타락하여 정치적 열기와 힘을 계속유지 하지 못하고 결국 대중의 노리개 깜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늘 창시자의 고독한 각성을 잊지 말아야 하고, 또 동시에 대중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종교는 늘 이중적인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 그 하나는 창시자의 고적한 영혼을 사색함이요, 또 다른 하나는 대중을 유지함이다.
종교는 늘 두 가지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 하나는 교주의 고적한 영혼의 깊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중의 구원이다. 교주의 고적한 영혼의 깊이를 사색하고 체험하는 곳에서는 철학적 사유가 더없이 필요하고, 대중을 교화하고 선도하는 곳에서는 대중적인 친화력이 더없이 요구된다. 종교는 정치처럼 그 대중적 세력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적 세력을 얻기 위하여 종교는 정치와 유사한 행적을 밟는다. 불교지도자는 교주 석가모니의 철학적 사유를 깊이 이해하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불교를 중흥시켜 온 정치지도자들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예컨대 한국불교가 신라의 문무대왕의 해중 능을 성지로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