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心遠) 김형효박사 5주기를 맞이하여
지교헌(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세월은 빠르기도 하여 심원(心遠)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지난날을 더듬어 본다.
내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심원(心遠)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1983년에 파견교수로 근무하게 된 때부터이다. 나는 그때 성균관대학교대학원에서 박사학위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연구원장이며 나의 지도교수이었던 도원(道原)류승국원장님의 추천으로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고 이어서 1년이 경과한 후에는 직장을 옮기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심원선생은 당시 연구원의 부원장이었고 유럽의 유명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학교에 근무하다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국민정신교육부 교육윤리연구실 부교수로 근무하면서 분석평가실장서리를 맡고 있었지만 도원선생님과 심원선생님과 기타 몇몇 분의 권고로 청주교육대학교를 떠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교육윤리연구실을 거쳐 철학종교연구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교육윤리연구실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영덕원장님의 취임 후에 있었던 조직의 개편에 따라 기획조정실의 권고로 소속을 옮기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때 <<맹자 공손추장구>>에 나오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의 심정이었다. 유럽의 명문 대학에서, 미국에서, 일본에서 학위를 취득한 여러 교수들과 국내의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연구 경력도 쌓은 훌륭한 교수님들과 함께 근무하고 연구하면서 나는 인사위원 · 기획위원 · 도서관장을 맡기도 하였다.
심원선생은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비롯한 중요한 서양철학사상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논문과 저서를 남기고 동양철학에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주목을 끌었다. 특히 2004년 4월에 출판한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부제; 현실적 소유론과 사실적 존재론 – 2책, 총805페이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청계출판사)는 온 세계의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고 연구하고 토론할만한 명저이며 대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저서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주목할 만한 대학자인지 능히 짐작할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날 갑자기 복도에서 만난 나에게 한자(漢字) 한 글자를 쪽지에 적어서 무슨 글자냐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얼핏 보아도 ‘曁’(기)라는 글자였다. 한글로는 ‘및’ ‘다다름’이고 영어로는 ‘and’라는 뜻으로 쓰이며, 중국에서는 간자체(簡字體)로 쓰지 않고 번자체(繁字體)로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회피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내가 연구실로 찾아가서 설명해야 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에게 질문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다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 후에 스스로 해결하였겠지만 그 때 나에게 실망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고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 일이 마음 한 구석에 오래 동안 남아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심원선생의 학술발표가 있었지만 나는 시일을 착각하여 참석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라고는 보기 드문 우연이었다.
나는 심원선생보다 먼저 회갑을 맞이하게 되어 기념문집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다른 교수들의 논문은 전혀 싣지 않고 나의 논문만을 싣게 되었고 심원선생은 ‘眞光不輝’라는 휘호를 주셔서 책을 빛내주었다. 진광불휘는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말과도 은근히 어울리는 말이며, 나의 학문이나 인격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안으로는 성숙한 수준이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로도 해석되었다.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난 광채가 많기도 하지만 그 많은 광채가 모두 참된 광채라고는 보기 어렵고 어떤 것은 거짓된 광채일 수도 있고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드러난 광채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더욱 빛날 수 있는 광채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인격이나 학문이나 특별히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그 언젠가는 반드시 빛날 것이며 그만한 바탕을 갖추고 있다고 칭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내가 정년퇴직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09년(?)에 연구원주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표할 때였다. 그런데 그 때 그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피로하게 보였고 재직시절과 같은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심원선생이 나보다 몇 년이나 젊기 때문에 나보다는 훨씬 건강하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척추분리증에 폐암을 수술한 형편이라 건강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세미나에서 서로 발표하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점점 두뇌부분의 혈액순환이 매우 좋지 않아 치매현상이 일어나고 드디어는 운명(殞命)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운명을 들었으나 조문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외출을 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편이나 우편으로 부의를 전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잘 되지 못하였다. 인사를 다 하지 못한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심원(心遠)! 나는 심원선생을 불러 본다. 그리고 그의 아호(雅號)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왜 하필이면 심원인가. 심원은 마음이 깊고 먼 것이다. 뜻을 원대히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응석이나 소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대인의 뜻을 갖는 것이다. 일신에 그치는 지혜로 그치지 말고 천하지지(天下之志)를 찾고 실천하는 것이다. 내 한 몸으로 그치지 않고 후세를 걱정하는 것이다. 마음이 멀면 땅은 저절로 넓어지고 마음이 먼 곳에 있으면 수레의 티끌이나 흔적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심원선생은 그 마음을 일신이나 하나의 가정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이웃과 국가와 세계와 우주에 미치게 하고 진정한 우주 속의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영예에 연연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매혹의 정치권력과는 스스로 멀리하고 심원의 세계에서 진리를 탐구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의 서거 5주년을 맞이하여 옛 정을 추억하며 이 글을 쓰게 되니 그의 생전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과 학문적 열정과 나에게 베풀어 준 많은 인정이 떠오른다. 그의 생전의 곧고 순진한 인품과 따뜻한 정과 학문적 열정을 우러르며 다시 한 번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심원(心遠) 김형효박사 5주기를 맞이하여
지교헌(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세월은 빠르기도 하여 심원(心遠)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지난날을 더듬어 본다.
내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심원(心遠)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1983년에 파견교수로 근무하게 된 때부터이다. 나는 그때 성균관대학교대학원에서 박사학위과정을 수료하고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연구원장이며 나의 지도교수이었던 도원(道原)류승국원장님의 추천으로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고 이어서 1년이 경과한 후에는 직장을 옮기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심원선생은 당시 연구원의 부원장이었고 유럽의 유명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학교에 근무하다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국민정신교육부 교육윤리연구실 부교수로 근무하면서 분석평가실장서리를 맡고 있었지만 도원선생님과 심원선생님과 기타 몇몇 분의 권고로 청주교육대학교를 떠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교육윤리연구실을 거쳐 철학종교연구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교육윤리연구실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영덕원장님의 취임 후에 있었던 조직의 개편에 따라 기획조정실의 권고로 소속을 옮기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때 <<맹자 공손추장구>>에 나오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의 심정이었다. 유럽의 명문 대학에서, 미국에서, 일본에서 학위를 취득한 여러 교수들과 국내의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연구 경력도 쌓은 훌륭한 교수님들과 함께 근무하고 연구하면서 나는 인사위원 · 기획위원 · 도서관장을 맡기도 하였다.
심원선생은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비롯한 중요한 서양철학사상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논문과 저서를 남기고 동양철학에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주목을 끌었다. 특히 2004년 4월에 출판한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부제; 현실적 소유론과 사실적 존재론 – 2책, 총805페이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청계출판사)는 온 세계의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고 연구하고 토론할만한 명저이며 대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저서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주목할 만한 대학자인지 능히 짐작할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날 갑자기 복도에서 만난 나에게 한자(漢字) 한 글자를 쪽지에 적어서 무슨 글자냐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얼핏 보아도 ‘曁’(기)라는 글자였다. 한글로는 ‘및’ ‘다다름’이고 영어로는 ‘and’라는 뜻으로 쓰이며, 중국에서는 간자체(簡字體)로 쓰지 않고 번자체(繁字體)로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회피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내가 연구실로 찾아가서 설명해야 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에게 질문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다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 후에 스스로 해결하였겠지만 그 때 나에게 실망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고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 일이 마음 한 구석에 오래 동안 남아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심원선생의 학술발표가 있었지만 나는 시일을 착각하여 참석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라고는 보기 드문 우연이었다.
나는 심원선생보다 먼저 회갑을 맞이하게 되어 기념문집을 발간하게 되었는데 다른 교수들의 논문은 전혀 싣지 않고 나의 논문만을 싣게 되었고 심원선생은 ‘眞光不輝’라는 휘호를 주셔서 책을 빛내주었다. 진광불휘는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말과도 은근히 어울리는 말이며, 나의 학문이나 인격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안으로는 성숙한 수준이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로도 해석되었다.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난 광채가 많기도 하지만 그 많은 광채가 모두 참된 광채라고는 보기 어렵고 어떤 것은 거짓된 광채일 수도 있고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드러난 광채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더욱 빛날 수 있는 광채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인격이나 학문이나 특별히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그 언젠가는 반드시 빛날 것이며 그만한 바탕을 갖추고 있다고 칭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내가 정년퇴직 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 2009년(?)에 연구원주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표할 때였다. 그런데 그 때 그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피로하게 보였고 재직시절과 같은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심원선생이 나보다 몇 년이나 젊기 때문에 나보다는 훨씬 건강하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척추분리증에 폐암을 수술한 형편이라 건강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세미나에서 서로 발표하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점점 두뇌부분의 혈액순환이 매우 좋지 않아 치매현상이 일어나고 드디어는 운명(殞命)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운명을 들었으나 조문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외출을 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편이나 우편으로 부의를 전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잘 되지 못하였다. 인사를 다 하지 못한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심원(心遠)! 나는 심원선생을 불러 본다. 그리고 그의 아호(雅號)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왜 하필이면 심원인가. 심원은 마음이 깊고 먼 것이다. 뜻을 원대히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의 응석이나 소인의 이기심을 버리고 대인의 뜻을 갖는 것이다. 일신에 그치는 지혜로 그치지 말고 천하지지(天下之志)를 찾고 실천하는 것이다. 내 한 몸으로 그치지 않고 후세를 걱정하는 것이다. 마음이 멀면 땅은 저절로 넓어지고 마음이 먼 곳에 있으면 수레의 티끌이나 흔적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심원선생은 그 마음을 일신이나 하나의 가정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이웃과 국가와 세계와 우주에 미치게 하고 진정한 우주 속의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영예에 연연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매혹의 정치권력과는 스스로 멀리하고 심원의 세계에서 진리를 탐구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의 서거 5주년을 맞이하여 옛 정을 추억하며 이 글을 쓰게 되니 그의 생전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과 학문적 열정과 나에게 베풀어 준 많은 인정이 떠오른다. 그의 생전의 곧고 순진한 인품과 따뜻한 정과 학문적 열정을 우러르며 다시 한 번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