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심원(心遠)선생과의 인연
이서행(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먼저 필자의 心遠 아호에서 떠오르는 선생님의 지적인 단상은 단순히 심적 기능이 원하는 心願분야가 아니라 동서철학과 종교문화를 관통하는 넓고 깊고 무한한 학문의 세계 즉 동서철학의 소통과 그 한계를 뛰어 넓는 心遠성을 추구하여 불모지의 한국철학과 실학사상의 지평을 넓히다 78년에 멈춘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이다.
제7대 국민윤리학회 회장직을 지낸 필자와 심원선생과의 인연은 80년 국민윤리학회 활동을 하면서 초대회장인 서울대 유달영 교수, 교총회장을 지낸 2대 회장인 한양대 유형진 교수, 이규호전 문교장관, 3대회장 고대 한승조 교수, 4대회장 서울대 박용헌 교수, 5대회장 성대 양흥모 교수, 중앙대 김민하 총장, 6대회장 건국대 김갑철 교수 등과 친분을 갖게 되면서 부터다. 필자가 82년 1월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옮길 때 심원선생은 부원장이었으며 필자를 적극 추천한분은 한승조 기획처장, 박용헌 연찬부장 이었는데 심원선생도 반대하지 않고 적극 환영해주셔서 가까운 유대관계가 남달리 이어졌다. 당시 원장은 고대교수로서 동국대 총장을 엮임한 정재각 선생이었는데 1년후 성균관대 유승국 교수가 원장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심원선생과 호흡이 잘 맞는 분을 원장으로 보낼려고 심원선생과 교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 된다. 즉 심원선생이 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할 때 유승국 선생과의 인연이 되어 추천하게 된 배경으로 기억된다.
큰 맥락에서 보면 심원 선생이 국민윤리학회의 원로들과 가진 친분은 심원선생의 서울대 은사인 박종홍선생의 정치철학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교육철학이 담긴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 나아가 70년대 초에 시작된 조국근대화와 사회개혁 국민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에 대한 지지가 배경이었다고 본다.
1983년도 어느날에 심원선생이 필자와 차담하면서 불쑥 꺼낸 화제가 교수와 국회의원의 비교였다. 사회적 역할 평가와 경제적 대우면에 대해서였는데 그 후 심원선생은 고뇌하며 12대 전국구의원(1985-1988) 입문으로 지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 그후 필자는 심원선생과의 대화 속에서 정치입문을 권유한 분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직접적인 영향은 박정희대통령시절 특보로 청와대에 들어가 국정방향의 큰 틀을 잡아준 은사인 박종홍교수의 영향이 컸음은 생전에 심원선생의 술회에서 나타났듯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여기서 심원선생의 일시적인 정치계 입문경력이 왜곡되어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시위때 나온 어용교수로 오인되어 서강대에서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직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시 심원선생의 고뇌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심원선생이 정계에 발을 내 디딘 배경은 다수가 교수직과 정계를 넘나든 정치교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상황에서 볼때 심원선생은 권력욕보다는 이념적인 남북대결의 극복과 새마을운동을 통한 국민들의 정신문화 쇄신을 위한 남다른 소신과 열정적인 철학자였다. 그가 스승인 박종홍 교수와 선배인 연세대 이규호 교수 등과 함께 개발연대 박정희 통치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을 시도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우연적 필연이었다고 본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는 뜻맞는 스승, 선배, 동료 지인들과 함께 박정희 통치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을 했지만 분단국가의 현실에서 미래지향적인 국가발전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선택이었지 속물적인 권력지향의 이데올로기적인 변절이 아니었음을 이 기회에 필자는 단언하고자 한다. 실제로 심원선생 철학사상의 지향점이었고 미래 통합 번영된 민족국가의 조망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심원선생이 당시에 주창한 상응혁명에 잘 나타나 있다. 상응혁명이란 김일성가의 1인 독재 주체사상 좌익혁명에 대응하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로서, 북한 무력공산혁명이 전체주의 광기에 불과한데 비해 자유민주주의 상응혁명이란 인본주의 사회혁명을 동시에 겨냥해야 한다고 심원선생이 1970년대 말에 주창한 대응 혁명이론을 일컫는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위의 상응혁명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각 대학에서 정치교육 혁신이 절실했으며, 기존의 1차원적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에서 벗어나 김일성주의와 대결해 그걸 압도하는 반공교육 수립이 목표였다. 80년대 초부터 각 대학에서 이데올로기비판교육이 정치교육의 일환으로서 필수과목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심원선생과 가까운 지인 독일 유학파 출신 즉 정치교육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규호 교수를 필두로 서울대 이용필 교수, 숭실대 전득주 교수, 이대 진덕규 교수와 홍순호 교수, 연대 박순영 교수, 외대 강성희 교수, 한양대 이기옥 교수, 인천대 김민하 총장, 건대 김갑철 교수 등 각대학 국민윤리 교수와 정치학과 교수가 주로 담당 했었다.
당시 독일 유학파가 중심된 이유는 독일은 미국이나 유럽의 여타 국가와는 달리 민주교육또는민주시민교육이 아니라정치교육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독일 평화통일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공민 교육이란 용어가 수용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국가를 위한 교육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동유럽이나 프랑스에서 정치 교육은 당파에 물든 이데올로기 교육을 의미하기에 독일의 정치 교육 개념이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거나 전이되기는 어려웠다.
독일인들은 자국에서정치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국제무대에서는시민 교육또는민주교육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했다. 1952년 11월 25일 '독일 연방 정치 교육원'이 개관 하면서 시민 교육은정치 교육이란 이름으로 정착 되었던 것이다.
정치교육은 주로 정치 이해와 참여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다지고 정치 참여 의지를 북돋우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1990년 통일직전 부터 독일의 정치교육은 협소한 의미의 정치 제도와 과정에 대한 교육을 넘어 더 포괄적인 민주주의 교육으로 재 적립 되면서 민주시민 교육과 개념적 차이가 사라졌다.
심원선생이시민정신교육이나정치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할 때 필자가 볼 때는 마치 독일의 철학자이면서 패국을 목전에 두고 국민통합을 이끌어 내 외적을 물리치고 유럽의 강국으로 부흥시킨 정신적 철학 지도자였던 피히테(Fichte,1763-1814)을 연상케 했다.
피히테는 외부 사회와의 마찰과 무신론자라는 누명으로 인해 결국 모교 예나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후일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명석한 시대적 강연을 펼쳐서 모두가 탄복하고 존경하는 정신적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피히테는 나폴레옹 군대 앞에 프러시아가 항복한 뒤 국왕과 함께 쾨니히스베르크에 갔다가 코펜하겐을 거쳐 1807년에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으로 되돌아 와서 이듬해 겨울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명연설을 통해 위기시대에 국민대통합을 이끌어 냈다. 필자로서는 피히테와 정치적 환경과 지형은 달라도 당시 심원선생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청면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었다.
피히테는 평소 존경한 칸트처럼 프랑스혁명에 한없이 환호했던 나폴레옹이 혁명을 통한 정치적 성과를 짓밟으며 유럽 전체를 정복하려 들자, 그를 ‘모든 악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프랑스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한 정의의 철학자였다. 이런 면모는 심원선생의 글이나 강연을 통해 그 유사성 과 닮음의 철학정신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필자가 한중연 연구원 연찬실장으로 재직시 <국가발전을 위한지도자간담회(각계각층의 차관급이상이 교육대상)> 특강을 심원선생에게 부탁한 적이 많은데 그 당시 필자가 생각할 때 심원성생이 공군사관학교 교수로서 재직시 남다른 애국적인 열정적인 강의가 몸에 체질화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심원선생의 평소 지론강의 내용중에 破邪顯正 사자성어가 기억된다.
본래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도리를 깨뜨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낸다는 뜻이지만, 평소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는 심원선생의 철학사상 가운데 유학과 불교색이 짙은 인생관의 한 단면의 표현이라고 본다. 심원선생의 지적영역 가운데 불교철학이 점유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필자도 학부시절 불교학개론과 칼 맑스의 공산주의 강의를 이기영 동국대 불교대학 학장한테 듣고 그 감동으로 졸업후 반공과 승공강사로 활동한바 있었으며 성철스님에게 법문들으러 해인사에 짦은 기간 동안 기거한 경험이 있어 그를 바탕으로 심원선생과 종교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토론한 바 있다.
필자도 학부시절에 철학과 에큐메니컬 신학을 병행하여 공부한 적이 있어 심원선생의 카톨릭 토양의 루벵대학에서 동서철학 공부 경험은 필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후 한반도 평화통일과 한국철학의 체계정립에 관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불교철학자 이기영교수와 18년 후배인 심원선생은 구라파유학서부터 겹치는 학문영역과 종교를 넘나드는 실천철학을 추구하는 자세에서 상호 아끼고 존중하는 관계였음을 알게 되었다.
연구원 시절 한때 차담하면서 필자가 부러운 듯이 심원선생의 끊임 없는 도전과 문제의식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천재성, 식을 줄 모르는 역동적인 열정과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겸손하게도 즉답을 피하고 역사적으로 불교에서는 원효선사 유학에서는 퇴계와 율곡을 지칭했으며 이 시대에 있어서 천재는 금년 초에 돌아가신 이대 교수였던 이어령 문화체육부 장관이라고 하는 겸손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심원성생과 대화중에 율곡선생의 정치철학에 공감하면서 필자의 석사논문인 <율곡의 이기론과 경장론>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는데 심원선생의 현실정치참여가 긍정적으로 생각되어 묵시적인 동의를 표한 적이 있었다. 즉 이이의 정치개혁가적 측면과 도덕사회를 주창하려 하였던 도학자의 면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심원선생은 필자가 도덕정치 담론에 머물러 있을때 실제 정치개혁의지를 실천적인 사회참여, 열정적인 강연과 국회의원직을 통해 표출했었다. 특히 율곡의 정치철학 화두 가운데 창업·수성보다 경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심원선생도 율곡처럼 폐단이 누적되어 경장에 힘써야 할 때라고 평소 사회개혁 정신교육 강연에서 강조하였다.
실제로 80년대 필자도 참여한 정부의 용역사업이었던 국민정신교육 교재『시련과 영광』,『국난극복』집필 내용 가운데서 심원선생의 평소 지론이었던 성웅 충무공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23전 23승이란 대승으로 구국한 애국심의 표상이 된死卽生 生卽死결연한 정신 등이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기억한다. 필자도 군 장교로 복무할 때 정신교육교관이었는데 당시 충무공의 구국정신에 탐닉한 바 있어 충무공의 애족애국심에 대해 당시 심원선생과 남다른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16세기 임진왜란 발발 10년전「민병 10만양성론」을 주장하여 미래 안보관을 제시했던 율곡의 경장론은 본래 태평한 세월이 장기간 지속되면 폐단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것이 누적되면 기존 질서가 붕괴되어 과감한 개혁으로 구제하지 않으면 망국하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또한 조상이 지은 옛집이 오래되어 재목이 썩어서 곧 무너지려는 상황에서 미봉적으로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으로경장의 중요성을 비유했는데, 심원선생도 시대상황으로 볼때 지도자의聖學:帝王之道’ 즉 수기치인이 절실하여 범사회적 의식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율곡은 당시 성학론에서 내외 변화정세의 환경 속에서 군왕이 인재를 분별하여 선비를 선발하고 신의정치로 도학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신념을 밝혔듯이 심원선생도 당시 제자양성과 취업에 남달리 애정과 의욕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은 예외 없이 외부 세계의 제약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극복해서 스스로 내적 자유를 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독일의 피히테는 영원히 전진하는 행동에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본다면, 심원선생의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교수와의 만남 이후 이미 자신의 철학을 찾기 시작했다고 본다. 카톨릭계통 벨기에 루뱅대학에 유학의 길은 미래생에 있어 큰 도전이었고 서양의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에서부터 유불을 통한 동양철학의 섭렵, 한국철학의 정립에 쏟은 열정에서 볼 때 자유주의 닮음의 철학을 엿보게 된다.
젊은 시절 피히테는 칸트처럼 종교란 도덕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으며 도덕법칙에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면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축복이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종교적인 힘이 모든 인류의 역사적인 과정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1813년, 「국가 철학」이라는 과목을 종강하는 자리에서 “이 땅의 모든 인류는 내적으로 결합된 유일한 기독교적인 국가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고 서양종교에 치우친 독일 민족주의 단면이 극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결국 칸트와 피히테도 무신론입장에서 철학을 시작했지만 칸트는 요청적인 신을 용납했고 피히테는 기독교 국가 통합을 희망했다. 심원선생도 그의 철학과 신학사상을 담은 아래글을 유추해보면 동서비교철학자로서 기독교를 비롯하여 유․불․도를 섭렵 하였기에 어느 한 종교로 단정하기보다는 통합적인 칸트적 신개념에 가깝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심원선생의 신학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면저는 장차 기독교 신학도 역사신학에서부터 마음의 신학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음의 신학으로 바뀌면 미래사회의 종교적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예수는 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며 불성을 찾든 그리스도성을 찾든 본성을 찾든 양지(良知)를 찾든 아무 관계가 없고, 그렇게 되면 미래에서는 종교의 구분이라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이로 인해 필자가 학부시절부터 접한 초교파 신학과 심원선생의 마음의 신학이 둘이 아님을 엿보게 되었다.
단적으로 필자는 김형효 교수의 아호 心遠과 법명 如天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처럼 심원선생의 생은 동서철학과 종교사상을 통해 유한에서 무한(一卽多)신개념을 추구하고 무한에서 유한(多卽一)의 실천적인 실학사상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지인들과 더불어 현실개혁을 위한 애국심 열정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정년이후 그의 생애철학이 묻어난 강연, 발표, 논문 등을 모은《철학 나그네》,《사유 나그네》,《마음 나그네》에서 心遠과 如天의 세계가 잘 들어났다고 보며, 책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제가 도착한 마지막 철학적 사유는 하이데거와 니체, 데리다를 잇는 서양의 해체철학과 동양의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한데서 동서철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비교를 통한 초미시세계와 초거시세계, 창조적 진화과정, 유무존재론의 始終이 과학적 사유세계를 넘어 종교심인 일심으로 관조되어 득도된 그의 경지를 읽게 된다.
끝으로 가깝게 지낸 지인의 운명적인 인연을 통해 보면 먼저 김형효 교수의 아호 心遠이 박종홍 은사를 통해 그의 철학적 사유가 끝없이 시작되었고, 조국근대화와 경제부흥을 가져온 박정희 민족지도자와 독일통일을 가져온정치교육문화을 도입한 독일학파 지인들을 통한 분단현실 극복과 한국적 민족번영의 애국심 의지가 형성되었다. 그후 청화 스님 설법집을 통해 환희심을 얻고 염불선 수행을 통해 성불의 세계를 체험한 후 차별없는 종교심의 과정을 거쳐, 혜거 스님에게 받은 如天이라는 법명에서 불심을 통해 동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독교의 Heaven으로부터 一心 如天이라는 心遠만의 독자적인 불교적마음의 신학을 세운 점에 후학으로서 찬사와 감탄을 아끼지 않게 된다.
1980년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심원(心遠)선생과의 인연
이서행(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먼저 필자의 心遠 아호에서 떠오르는 선생님의 지적인 단상은 단순히 심적 기능이 원하는 心願분야가 아니라 동서철학과 종교문화를 관통하는 넓고 깊고 무한한 학문의 세계 즉 동서철학의 소통과 그 한계를 뛰어 넓는 心遠성을 추구하여 불모지의 한국철학과 실학사상의 지평을 넓히다 78년에 멈춘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이다.
제7대 국민윤리학회 회장직을 지낸 필자와 심원선생과의 인연은 80년 국민윤리학회 활동을 하면서 초대회장인 서울대 유달영 교수, 교총회장을 지낸 2대 회장인 한양대 유형진 교수, 이규호전 문교장관, 3대회장 고대 한승조 교수, 4대회장 서울대 박용헌 교수, 5대회장 성대 양흥모 교수, 중앙대 김민하 총장, 6대회장 건국대 김갑철 교수 등과 친분을 갖게 되면서 부터다. 필자가 82년 1월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옮길 때 심원선생은 부원장이었으며 필자를 적극 추천한분은 한승조 기획처장, 박용헌 연찬부장 이었는데 심원선생도 반대하지 않고 적극 환영해주셔서 가까운 유대관계가 남달리 이어졌다. 당시 원장은 고대교수로서 동국대 총장을 엮임한 정재각 선생이었는데 1년후 성균관대 유승국 교수가 원장으로 발령되었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심원선생과 호흡이 잘 맞는 분을 원장으로 보낼려고 심원선생과 교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 된다. 즉 심원선생이 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할 때 유승국 선생과의 인연이 되어 추천하게 된 배경으로 기억된다.
큰 맥락에서 보면 심원 선생이 국민윤리학회의 원로들과 가진 친분은 심원선생의 서울대 은사인 박종홍선생의 정치철학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교육철학이 담긴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 나아가 70년대 초에 시작된 조국근대화와 사회개혁 국민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에 대한 지지가 배경이었다고 본다.
1983년도 어느날에 심원선생이 필자와 차담하면서 불쑥 꺼낸 화제가 교수와 국회의원의 비교였다. 사회적 역할 평가와 경제적 대우면에 대해서였는데 그 후 심원선생은 고뇌하며 12대 전국구의원(1985-1988) 입문으로 지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 그후 필자는 심원선생과의 대화 속에서 정치입문을 권유한 분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직접적인 영향은 박정희대통령시절 특보로 청와대에 들어가 국정방향의 큰 틀을 잡아준 은사인 박종홍교수의 영향이 컸음은 생전에 심원선생의 술회에서 나타났듯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여기서 심원선생의 일시적인 정치계 입문경력이 왜곡되어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시위때 나온 어용교수로 오인되어 서강대에서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직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시 심원선생의 고뇌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심원선생이 정계에 발을 내 디딘 배경은 다수가 교수직과 정계를 넘나든 정치교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상황에서 볼때 심원선생은 권력욕보다는 이념적인 남북대결의 극복과 새마을운동을 통한 국민들의 정신문화 쇄신을 위한 남다른 소신과 열정적인 철학자였다. 그가 스승인 박종홍 교수와 선배인 연세대 이규호 교수 등과 함께 개발연대 박정희 통치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을 시도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우연적 필연이었다고 본다.
앞에서 밝힌 대로 그는 뜻맞는 스승, 선배, 동료 지인들과 함께 박정희 통치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을 했지만 분단국가의 현실에서 미래지향적인 국가발전과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선택이었지 속물적인 권력지향의 이데올로기적인 변절이 아니었음을 이 기회에 필자는 단언하고자 한다. 실제로 심원선생 철학사상의 지향점이었고 미래 통합 번영된 민족국가의 조망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심원선생이 당시에 주창한 상응혁명에 잘 나타나 있다. 상응혁명이란 김일성가의 1인 독재 주체사상 좌익혁명에 대응하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로서, 북한 무력공산혁명이 전체주의 광기에 불과한데 비해 자유민주주의 상응혁명이란 인본주의 사회혁명을 동시에 겨냥해야 한다고 심원선생이 1970년대 말에 주창한 대응 혁명이론을 일컫는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위의 상응혁명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각 대학에서 정치교육 혁신이 절실했으며, 기존의 1차원적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에서 벗어나 김일성주의와 대결해 그걸 압도하는 반공교육 수립이 목표였다. 80년대 초부터 각 대학에서 이데올로기비판교육이 정치교육의 일환으로서 필수과목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심원선생과 가까운 지인 독일 유학파 출신 즉 정치교육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규호 교수를 필두로 서울대 이용필 교수, 숭실대 전득주 교수, 이대 진덕규 교수와 홍순호 교수, 연대 박순영 교수, 외대 강성희 교수, 한양대 이기옥 교수, 인천대 김민하 총장, 건대 김갑철 교수 등 각대학 국민윤리 교수와 정치학과 교수가 주로 담당 했었다.
당시 독일 유학파가 중심된 이유는 독일은 미국이나 유럽의 여타 국가와는 달리 민주교육또는민주시민교육이 아니라정치교육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독일 평화통일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공민 교육이란 용어가 수용되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국가를 위한 교육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동유럽이나 프랑스에서 정치 교육은 당파에 물든 이데올로기 교육을 의미하기에 독일의 정치 교육 개념이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거나 전이되기는 어려웠다.
독일인들은 자국에서정치교육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국제무대에서는시민 교육또는민주교육이라는 용어를 대신 사용했다. 1952년 11월 25일 '독일 연방 정치 교육원'이 개관 하면서 시민 교육은정치 교육이란 이름으로 정착 되었던 것이다.
정치교육은 주로 정치 이해와 참여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다지고 정치 참여 의지를 북돋우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1990년 통일직전 부터 독일의 정치교육은 협소한 의미의 정치 제도와 과정에 대한 교육을 넘어 더 포괄적인 민주주의 교육으로 재 적립 되면서 민주시민 교육과 개념적 차이가 사라졌다.
심원선생이시민정신교육이나정치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할 때 필자가 볼 때는 마치 독일의 철학자이면서 패국을 목전에 두고 국민통합을 이끌어 내 외적을 물리치고 유럽의 강국으로 부흥시킨 정신적 철학 지도자였던 피히테(Fichte,1763-1814)을 연상케 했다.
피히테는 외부 사회와의 마찰과 무신론자라는 누명으로 인해 결국 모교 예나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후일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명석한 시대적 강연을 펼쳐서 모두가 탄복하고 존경하는 정신적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피히테는 나폴레옹 군대 앞에 프러시아가 항복한 뒤 국왕과 함께 쾨니히스베르크에 갔다가 코펜하겐을 거쳐 1807년에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으로 되돌아 와서 이듬해 겨울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명연설을 통해 위기시대에 국민대통합을 이끌어 냈다. 필자로서는 피히테와 정치적 환경과 지형은 달라도 당시 심원선생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청면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었다.
피히테는 평소 존경한 칸트처럼 프랑스혁명에 한없이 환호했던 나폴레옹이 혁명을 통한 정치적 성과를 짓밟으며 유럽 전체를 정복하려 들자, 그를 ‘모든 악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프랑스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한 정의의 철학자였다. 이런 면모는 심원선생의 글이나 강연을 통해 그 유사성 과 닮음의 철학정신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필자가 한중연 연구원 연찬실장으로 재직시 <국가발전을 위한지도자간담회(각계각층의 차관급이상이 교육대상)> 특강을 심원선생에게 부탁한 적이 많은데 그 당시 필자가 생각할 때 심원성생이 공군사관학교 교수로서 재직시 남다른 애국적인 열정적인 강의가 몸에 체질화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심원선생의 평소 지론강의 내용중에 破邪顯正 사자성어가 기억된다.
본래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한 도리를 깨뜨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낸다는 뜻이지만, 평소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는 심원선생의 철학사상 가운데 유학과 불교색이 짙은 인생관의 한 단면의 표현이라고 본다. 심원선생의 지적영역 가운데 불교철학이 점유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필자도 학부시절 불교학개론과 칼 맑스의 공산주의 강의를 이기영 동국대 불교대학 학장한테 듣고 그 감동으로 졸업후 반공과 승공강사로 활동한바 있었으며 성철스님에게 법문들으러 해인사에 짦은 기간 동안 기거한 경험이 있어 그를 바탕으로 심원선생과 종교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토론한 바 있다.
필자도 학부시절에 철학과 에큐메니컬 신학을 병행하여 공부한 적이 있어 심원선생의 카톨릭 토양의 루벵대학에서 동서철학 공부 경험은 필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후 한반도 평화통일과 한국철학의 체계정립에 관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불교철학자 이기영교수와 18년 후배인 심원선생은 구라파유학서부터 겹치는 학문영역과 종교를 넘나드는 실천철학을 추구하는 자세에서 상호 아끼고 존중하는 관계였음을 알게 되었다.
연구원 시절 한때 차담하면서 필자가 부러운 듯이 심원선생의 끊임 없는 도전과 문제의식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천재성, 식을 줄 모르는 역동적인 열정과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느냐는 질문에 겸손하게도 즉답을 피하고 역사적으로 불교에서는 원효선사 유학에서는 퇴계와 율곡을 지칭했으며 이 시대에 있어서 천재는 금년 초에 돌아가신 이대 교수였던 이어령 문화체육부 장관이라고 하는 겸손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심원성생과 대화중에 율곡선생의 정치철학에 공감하면서 필자의 석사논문인 <율곡의 이기론과 경장론>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는데 심원선생의 현실정치참여가 긍정적으로 생각되어 묵시적인 동의를 표한 적이 있었다. 즉 이이의 정치개혁가적 측면과 도덕사회를 주창하려 하였던 도학자의 면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심원선생은 필자가 도덕정치 담론에 머물러 있을때 실제 정치개혁의지를 실천적인 사회참여, 열정적인 강연과 국회의원직을 통해 표출했었다. 특히 율곡의 정치철학 화두 가운데 창업·수성보다 경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심원선생도 율곡처럼 폐단이 누적되어 경장에 힘써야 할 때라고 평소 사회개혁 정신교육 강연에서 강조하였다.
실제로 80년대 필자도 참여한 정부의 용역사업이었던 국민정신교육 교재『시련과 영광』,『국난극복』집필 내용 가운데서 심원선생의 평소 지론이었던 성웅 충무공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23전 23승이란 대승으로 구국한 애국심의 표상이 된死卽生 生卽死결연한 정신 등이 상당부분 반영되었음을 기억한다. 필자도 군 장교로 복무할 때 정신교육교관이었는데 당시 충무공의 구국정신에 탐닉한 바 있어 충무공의 애족애국심에 대해 당시 심원선생과 남다른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16세기 임진왜란 발발 10년전「민병 10만양성론」을 주장하여 미래 안보관을 제시했던 율곡의 경장론은 본래 태평한 세월이 장기간 지속되면 폐단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것이 누적되면 기존 질서가 붕괴되어 과감한 개혁으로 구제하지 않으면 망국하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또한 조상이 지은 옛집이 오래되어 재목이 썩어서 곧 무너지려는 상황에서 미봉적으로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으로경장의 중요성을 비유했는데, 심원선생도 시대상황으로 볼때 지도자의聖學:帝王之道’ 즉 수기치인이 절실하여 범사회적 의식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율곡은 당시 성학론에서 내외 변화정세의 환경 속에서 군왕이 인재를 분별하여 선비를 선발하고 신의정치로 도학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신념을 밝혔듯이 심원선생도 당시 제자양성과 취업에 남달리 애정과 의욕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은 예외 없이 외부 세계의 제약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극복해서 스스로 내적 자유를 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독일의 피히테는 영원히 전진하는 행동에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본다면, 심원선생의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교수와의 만남 이후 이미 자신의 철학을 찾기 시작했다고 본다. 카톨릭계통 벨기에 루뱅대학에 유학의 길은 미래생에 있어 큰 도전이었고 서양의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에서부터 유불을 통한 동양철학의 섭렵, 한국철학의 정립에 쏟은 열정에서 볼 때 자유주의 닮음의 철학을 엿보게 된다.
젊은 시절 피히테는 칸트처럼 종교란 도덕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으며 도덕법칙에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면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축복이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종교적인 힘이 모든 인류의 역사적인 과정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1813년, 「국가 철학」이라는 과목을 종강하는 자리에서 “이 땅의 모든 인류는 내적으로 결합된 유일한 기독교적인 국가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고 서양종교에 치우친 독일 민족주의 단면이 극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결국 칸트와 피히테도 무신론입장에서 철학을 시작했지만 칸트는 요청적인 신을 용납했고 피히테는 기독교 국가 통합을 희망했다. 심원선생도 그의 철학과 신학사상을 담은 아래글을 유추해보면 동서비교철학자로서 기독교를 비롯하여 유․불․도를 섭렵 하였기에 어느 한 종교로 단정하기보다는 통합적인 칸트적 신개념에 가깝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심원선생의 신학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면저는 장차 기독교 신학도 역사신학에서부터 마음의 신학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음의 신학으로 바뀌면 미래사회의 종교적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예수는 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며 불성을 찾든 그리스도성을 찾든 본성을 찾든 양지(良知)를 찾든 아무 관계가 없고, 그렇게 되면 미래에서는 종교의 구분이라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이로 인해 필자가 학부시절부터 접한 초교파 신학과 심원선생의 마음의 신학이 둘이 아님을 엿보게 되었다.
단적으로 필자는 김형효 교수의 아호 心遠과 법명 如天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처럼 심원선생의 생은 동서철학과 종교사상을 통해 유한에서 무한(一卽多)신개념을 추구하고 무한에서 유한(多卽一)의 실천적인 실학사상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지인들과 더불어 현실개혁을 위한 애국심 열정에 반영되었다고 본다. 정년이후 그의 생애철학이 묻어난 강연, 발표, 논문 등을 모은《철학 나그네》,《사유 나그네》,《마음 나그네》에서 心遠과 如天의 세계가 잘 들어났다고 보며, 책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제가 도착한 마지막 철학적 사유는 하이데거와 니체, 데리다를 잇는 서양의 해체철학과 동양의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한데서 동서철학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비교를 통한 초미시세계와 초거시세계, 창조적 진화과정, 유무존재론의 始終이 과학적 사유세계를 넘어 종교심인 일심으로 관조되어 득도된 그의 경지를 읽게 된다.
끝으로 가깝게 지낸 지인의 운명적인 인연을 통해 보면 먼저 김형효 교수의 아호 心遠이 박종홍 은사를 통해 그의 철학적 사유가 끝없이 시작되었고, 조국근대화와 경제부흥을 가져온 박정희 민족지도자와 독일통일을 가져온정치교육문화을 도입한 독일학파 지인들을 통한 분단현실 극복과 한국적 민족번영의 애국심 의지가 형성되었다. 그후 청화 스님 설법집을 통해 환희심을 얻고 염불선 수행을 통해 성불의 세계를 체험한 후 차별없는 종교심의 과정을 거쳐, 혜거 스님에게 받은 如天이라는 법명에서 불심을 통해 동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독교의 Heaven으로부터 一心 如天이라는 心遠만의 독자적인 불교적마음의 신학을 세운 점에 후학으로서 찬사와 감탄을 아끼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