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같으신 선생님 : 심경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같으신 선생님 

 

         심경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만남이었거늘 당시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일들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1989년 운중동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중앙연구원)에서 김형효 선생님들 뵈온 일이 그 하나이다. 구내 매점 앞에 낙엽들이 낮게 휘돌던 날이었다. 주변에 마땅한 음식점도 없었던 시절이라, 교직원들이나 연구자들은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던 시절이다. 원로 교수들은 왼쪽 창가 테이블을 쓰시고, 직원분들은 오른켠 테이블을 사용했다. 어린 나이에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던 나는 식사 시간이면 어느 쪽에 앉아야 할지 망설이고는 했다. 

어느 날인가, 선생님께서 식판을 들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오셔서, 한문고전을 연구한다니 반갑다고 하셨다. 부임한 직후 연구실로 인사하러 갔던 일이 있었으나,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부원장으로 계실 때 부득이 민정당 국회의원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치적 신념이 같지 않으리라 여겨서 굳이 가까이 뵈려고 하지 않아 왔었다. 선생님은 키가 크시고 옅은 고동색 콤비를 즐겨 입으셨으며. 허리는 구부정하셨지만 걸음이 빠르셨는데, 늘 사색에 잠겨 계셨고, 얼굴 주위에 신비로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구내식당의 테이블에 않으신 선생님은 안경 너머 눈빛이 무척 맑았다. 그리고, 그래서, 그렇다면…. 대화의 중심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추어주시던 그 말씀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일생 많은 학자분들을 만나뵐 수 있었지만, 사실상 나의 사유를 계발해주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특정 주제를 두고 오랜 시간 토론하기보다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교감하는데 그치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기 때문일 듯하다. 

김형효 선생님은 󰡔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공저를 기획하시고, 철학 분야만이 아니라 퇴계의 문학에 대해서도 논해야 한다고 하면서 글을 써보라고 권하셨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사상가대계 4, 1997.7 간행). 아마도 그날 식사 시간의 대화 때 내가 문학을 통해 심상구조와 논리구조를 동시에 살피려 한다는 뜻을 말씀 드렸던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학부 때 철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는데, 석사과정을 마치고 조교를 하다가 독일의 한 대학에 동방학 연구소가 설립되었을 때 조교로 추천된 일이 있었다. 김형효 선생님은 근대 이후 신 학문체제가 분리해 놓았듯이 문학과 철학을 확연히 구분해서는 안 될 듯하다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근세 이전 한국의 사상가들은 동시에 문학가이기도 하여, 시문을 이해하지 않으면 철학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시면서, 나의 공부를 격려해주셨다. 

나는 김형효 선생님에게서 사상사 공부와 관련하여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사상사를 장기간 분열과 위대한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개괄하시고, 원효의 화쟁(和諍)·무쟁(無諍)과 퇴계의 이기론을 위대한 통일의 주요 사례로 보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영국의 스코틀랜드 하일랜드(Highland) 켈트족의 불사신 전설을 떠올렸다. 영화를 통해서 이해한 바로는 하일랜더(Highlander)는 단 한 명의 불사신만 존재해야 한다는 규율 때문에 세상의 또 다른 불사신들과 결투를 벌여야 한다. 사상사의 위대한 통일자는 그러한 규율에 구속된 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떻든 사상사를 분열과 통일의 관점에서 개괄하신 선생님의 구도는 나로서는 우리나라 문학사, 사상사, 문화사, 역사를 큰 그림으로 이해하게 만든 기초가 되었다. 

특히 김형효 선생님은 내게 퇴계의 이기론 나아가 조선시대의 성리학을 개괄할 때 ‘이자도(理自到)’에 주목하도록 이끌어주셨다. 나는 한학을 공부했지만 이기론에 대해서는 굳이 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논쟁은 철학적 담론이라기보다도 논쟁을 위한 논쟁, 계파 옹호의 기제로 성격을 띠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정문연’에 있을 때 퇴계 관련 공저를 위한 보고회에서 선생님은 이(理)는 형언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보아야 하며, ‘이자도’는 계시(啓示)와도 같은 개념이라고 말씀하셨다. 신적인 존재의 계시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유학에서 말하는 대월상제(對越上帝), 주자학에서 말하는 거경(居敬)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대학 2학년 1학기 때 일요일마다 이화여대에 재직하시던 허혁 선생님 연구실로 가서 불트만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 자체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으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려면 불트만의 논법을 이해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형효 선생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면서 그 공부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나는 근대 이전 여러 인물들을 연구할 때 사상의 육화(肉化)를 점검하게 되었다. 󰡔김시습평전󰡕을 집필하면서 ‘사상의 육화’의 궤적을 찾아내고자 고투한 것은 그 한 예이다.  

김형효 선생님의 사유는 종교적 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90년에 선생님의 저서 󰡔孟子와 荀子의 哲學思想 : 哲學的 思惟의 두 源泉󰡕(삼지원, 1990)과 󰡔(가브리엘 마르셀의)具體哲學과 旅程의 形而上學󰡕(인간사랑, 1990)이 출간되었을 때, 그 두 책을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탐독했다. 후자의 책은 특히 선생님의 학문적 사유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저서라고 생각한다. 신체 속에 수육(受肉)되어 타자와 함께 있는 구체적 생활에 주목하고 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 단절의 시대에 더욱 희망의 빛처럼 느껴진다. 나는 󰡔논어󰡕를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이 점에 주목했다.   

선생님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가르쳐 주셨다. 내가 󰡔다산과 춘천󰡕을 집필하면서 강원대학교로 근무지를 옮길 결심을 했을 때, 선생님은 연구환경을 바꾸는 것을 격려해 주셨다. 1992년 7월, 송구스럽게 선생님 차를 타고 서울 시내까지 오면서 학문과 생활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달래내를 넘어 고속도로가 끝나고 예술의 전당 부근으로 향할 때, 선생님은 󰡔논어󰡕에서 어느 구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셨다. ‘금여획(今汝畫)’ 세 글자라고 말씀 드리고, 󰡔맹자󰡕의 ‘용광필조(容光必照)’와 연계시켜 부연하면서, 본래 한문학을 폐기하기 위해 한문학을 전공으로 택했으나 󰡔논어󰡕의 그 강렬한 메시지에 이끌려 한문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운전대를 두드리시며 몇 번이고 그 구절을 되뇌셨다. 

이후 선생님을 뵈올 기회가 없었다. 옥고를 더 읽지도 못했다. 선생님은 2013년 여름 이후 활동을 못 하시다가 2018년 2월 작고하셨다. 그러나 내게 선생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시다. 2021년 2월 정년을 해서 연구실 책을 정리하게 되어, 서가의 중심에 두었던 선생님의 두 저서를 박스에 넣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선생님께서 계발해주셨던 사유의 방식을 더 확장시킬 시간이 내게 허여될까? 나는 시방 목이 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