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함을 깨우쳐 주신 선승(禪僧)
박정진(문화인류학박사·THINK TANK 2022 정책연구원 소장)
철학이라는 학문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또 철학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은 앎을 위한 것일까?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삶과 함께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두려워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동서철학의 광범위한 지식을 잘 요약·정리하고 강의를 잘하면 훌륭한 철학자가 되는 것인가. 과연 우리나라에서 철학함을 실천한 철학자는 있었던 것일까. 요컨대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철학이 과연 글로벌시대에도 퇴계철학으로 통용될까. 모르긴 몰라도 중국에서는 주자(朱子)철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퇴계를 칭송하는 것은 은근히 주자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 다층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대학교에 진학해서 경험한 철학이라는 과목은 동서양철학의 내용을 지식으로 익히는 것에 불과하였다. 서양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동양의 공자, 노자, 맹자, 장자, 제자백가….
앞에서 열거한 인물은 철학의 전범을 보여준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을 고스란히 외우고 번역하는 것이 오늘날 철학함은 아니다. 이들의 철학을 잘 아는 것이 철학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점에서 근대한국의 철학자들은 철학함을 실천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혹은 우리말인 한글로 사유하는 습관을 가진 학자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나는 심원(心遠) 김형효(金炯孝)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철학자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선생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철학을 대하는 태도를 훔쳐보면서 마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다. 철학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동안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지식들을 재빨리 재점검하고, 또 그것을 나의 사유로 순간적으로 넘어서면서, 나름대로 내 철학체계를 구축하는 데 열중할 수 있었다.
모처럼 질문다운 질문, 질문이 답이 되고, 답이 질문이 되는 촌철살인 할 것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사유의 단비를 맞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요점을 간략하게 말해주면서도 모자람을 보충이라도 하듯 반문을 해줄 때가 많았다. 아마 그 중에는 제대로 개념을 알고 있는 지를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구두시험 말이다. 이러한 주고받음은 생각하는 힘을 북돋워주었다.
물론 지식적 측면에서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도 철학공부와 사유훈련을 스스로 해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969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의예과를 거치는 동안 대학도서관에서 문학과 철학 , 그리고 동서양의 고전들을 게걸스럽게 정복해갔던 시절도 있었다. 이때 읽은 책은 헤아릴 수도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차륜 밑에서’, 샤르트르의 ‘말’과 ‘구토’, 까뮈의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스털링 P. 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등도 즐겨 읽는 책이었다. 경향신문 학술기자로 있던 나에게 강성위(외국어대)교수는 자신이 번역한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상하)를, 임석진(명지대)교수는 자신의 학위논문인 ‘헤겔의 노동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선물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철학을 해볼 것을 종용했으며, 철학이야기가 통하는 언론인인 나를 즐겨 찾아왔다. 나는 그때를 계기로 철학에 대한 관심을 배가시켰다.
본격적인 철학적 사유에 접어든 것은 영남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부터다. 비교문화, 혹은 비교문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철학의 길로 유혹을 했던 셈이다. 또한 자생인류학의 길을 개척하려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철학적 훈련이었다. 철학적 사유는 모든 학문의 기초로서 필요한 것이었고, 인류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86아시안게임이 벌어질 무렵, 한국의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바람, 말하자면 ‘신(新)실학운동으로서의 인문학’을 주창하는 일군의 소장학자들이 있었다. 철학도 문화적 성숙과 함께 어떤 현실적 필요와 계기를 만나야 구체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시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박사과정을 마친 신분으로 여기에 참가했다. 학자들은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발행하는 『문화와 예술』이라는 잡지(1986∼1988)에 기고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하였다. 나의 예술인류학 정초작업은 이런 계기를 통해 윤곽을 잡아갔다.
당시 나 자신도 모르게 한국문화를 토대로, 혹은 한글개념을 토대로 철학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요컨대 ‘멋’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국문화를 철학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입술소리인 ‘ㅁ’으로 시작되는 <멋(의), 맛(식), 마당(주), 한마당(굿판=문화총체), 말(언어)>을 가지고 한국문화의 의식주의 원형과 문화총체, 그리고 일상생활의 ‘말’까지를 포함하는 문화적 원형을 창출하기도 했다. ‘손’(솜씨, 쓰다, 그리다)이라는 말로 문화적 행위의 원형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작업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 혹은 본능과 결부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단행본으로 처음 묶은 것이 바로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미래문화사, 1990)이라는 책이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의 뒤표지에는 이런 경구가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신(神)이 되고자 했으나, 이제는 신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시대에 들어왔다. 심정문화, 그것은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신(神)의 복음(福音)이다./지금까지 한국문화는 지극히 극단적으로 억눌린 감정(정사)의 하나인 한(恨)과, 정반대로 지극히 솟아오르는 감정의 하나인 신(神, 神明)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 중간의 멋(맛)으로 우리 문화를 해석할 때가 되었다./멋은 예술적으로 문화를 고양시키며, 이를 해석하는 순수우리말이다. 멋의, 멋에 의한, 멋을 위한 그러한 멋의 한국문화를 창달하고 해석하는 첫 탐험이 여기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기를…….”
지금 돌이켜 보아도 이 책은 참으로 독창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논리전개상 더러 거칠게 전개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순 우리말(한글)’로 우리문화체계를 정리한 거의 최초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당)사상과 예술인류학’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나는 한국문화예술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함께, 지금 생각하면 마치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것과도 같은, 한국적 존재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내가 주장한 이론은 바로 ‘역동적(力動的, 易動的, 逆動的) 장(場)의 개폐(開閉)이론(DSCO: Dynamic Space-Time, Close and Open)’이라는 것이었다. DSCO이론은 일종의 큰 이론(Grand Theory)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장(場)이라는 것을 의식의 차원에서 말하면, 의식의 열린 상태(O)가 ‘존재’라면 의식의 닫힌 상태(C)가 ‘존재자’가 되는 셈이다. 장(場)은 전자기장(電磁氣場)의 의미와도 통한다는 점에서 현대물리학으로도 확장될 수 있는 거대담론이었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모두 고정불변의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열린-닫힌 상태의 이중적 몸짓, 경계의 운동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체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 머물거나 아니면 그 체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동시에 가진 동물임을 주장하는 저의가 담겨있었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은 세계를 실체로 볼 것이냐, 비실체로 볼 것이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 철학, 예술, 과학, 시 등 문화전반을 다루면서 토착적 담론을 전개했던 것 같다. 그 후에도 나는 직업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수많은 저술을 하면서 지냈다. 지금까지 시집을 포함하여 인문학 저술이 백여 권을 넘는 것을 보면 해마다 3, 4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냈다.
내가 김형효 선생님을 만난 것은 2011년 봄(5월) 무렵이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문화포럼(갤러리 THE FOUR)에서였다. 당시 심원선생님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문화포럼에서 나와서 “사유하는 도덕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도덕경을 강의하면서도 항상 동서비교철학적 안목을 보여주셨고, 철학의 대중화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신문기자로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 출입기자로서 당시 정문연의 부원장으로 계시던 선생님을 만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철학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인류학자로서 선생님을 만난 것은 ‘인사문화포럼’이 처음이었다.
‘사유하는 도덕경’ 강의는 도덕경의 내용과 서양의 해체철학을 비교하면서 진행되는 강의였다. 동서철학의 유의미한 철학소(哲學素)를 찾아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조명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의 질문과 대답이 활기차게 오고가는 대화의 장이었다.
선생님은 원로철학자로서의 권위는 전혀 내보이지 않았고, 편하게 대화하고 질문할 수 있는 동네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로 좌중을 압도하는 힘을 보여주셨다. 그러한 자유로운 토론분위기가 그동안 내 속에 쌓여서 잠자고 있던 철학적 힘을, 간헐적으로 여러 저작 속에 분출되었지만, 철학적 체계를 갖추고 드러날 것을 자극했다.
나는 당시 송파구 석촌호수 주변에 살았는데 선생님은 송파구 올림픽 선수촌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관계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토론을 연장할 수 있었다.
심원선생님은 동서철학의 내용을 나름대로 소화하고 정리하고 평가한 20, 30권의 굵직한 철학서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미진했던 철학적 사유들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고,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길렀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선생님과의 대화는 나의 철학적 소양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내가 즐겨 읽은 선생님의 책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를 위한 철학”(물결, 1976) “한국사상 산고”(일지사, 1979) “한국정신사의 현재적 인식”(고려원, 1985) “동서철학에 대한 주체적 기록”(고려원, 1985)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89) “가브리엘 마르셀의 구체철학과 여정의 형이상학”(인간사랑, 1990) “베르그송의 철학”(민음사, 1991) “데리다의 해체철학”(민음사, 1993) “메를로-퐁티와 애매성의 철학”(철학과 현실, 1996) “현실에의 철학적 접근”(물결, 1997)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청계, 2001)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청계, 2002) “물학, 심학, 실학”(청계, 2003)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2004) “철학적 사유의 진리에 대하여 1, 2”(청계, 2004) “원효의 대승철학”(소나무, 2006) “철학 나그네”(소나무, 2010) “마음 나그네”(소나무, 2010) “사유 나그네”(소나무, 2010), “마음혁명”(살림, 2010) 등이었다. 그리고 번역서로 “방법서설(김형효 번역)”(사단법인 올재, 2014)이 있다.
나는 선생님의 책들을 삼독사독하면서 스스로 일취월장하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약 1년간의 만남과 소통의 결과로 2012년 1월에, 나는 “철학의 선물, 선물의 철학”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소나무, 2012)라는 철학서 2권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인사동 인사문화포럼(2012년 2월 23일, 갤러리 더포)에서 열렸다. 이때 선생님과 사모님은 출판기념회가 끝나는 이슥한 저녁 무렵까지 함께 머물면서 축하해주셨다. 선생님은 축사를 통해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를 들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다음으로 박정진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고 선생님을 과찬을 해주셨다.
나는 이 책머리에 ‘나는 이 책을 자생철학의 시원을 이룬 김형효 선생님에게 바친다’고 증정을 표했다.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나의 첫 철학책은 시장에서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2014년 봄, 2월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사모님이 전화를 해서 선생님을 바꾸어주셨는데 내용인즉 카톨릭 생명윤리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대회(제 10회 정기학술대회)에 제출키로 약속한 논문을 쓰지 못해서 난처한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논문을 대신 쓰고, 발표에 나갈 수 없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을 잘못 들었는 것은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사모님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면서 내가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조언이었다. 나는 황송해서 “제가 어떻게 선생님이 발표할 자리에 감히 나가느냐.”고 일단 사양했다. 그런데도 다시 부탁하셔서 부담스럽지만 결국 원고를 쓰기로 했다.
주제는 ‘과학문명시대의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서의 몸’이었다. 이 주제는 과학시대의 시대정신은 물론이고, 이에 적응하는 인간의 몸에 대한 여러 차원의 이론전개가 필요한 것이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나름대로 정리된 체계가 없으면 주제에 부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메를로-퐁티의 신체현상학과 가브리엘 마르셀의 구체철학과 여정의 형이상학을 펼쳐놓고 정독하는 한편 의과대학에 다닐 때의 의학과 생물학 지식을 동원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보름정도 걸려 원고를 마칠 수 있었다. 원고를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는데, 며칠 지나서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원고내용이 좋다고 하면서 바로 주최 측에 제출하도록 주선하셨다.
나는 가톨릭 생명윤리연구소 주최 제 10회 정기학술대회(2014년 3월 15일, 오후 2시∼6시, 카톨릭 대학교 성의교정 성의회관 5층 504호, 주제: 몸의 생명현상과 사회·윤리적 성찰)에 논문을 발표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생님은 너무나 과분한 인정을 해준 셈이었다. 아마도 여기에는 후학들을 격려해주는 선생님의 마음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선종(禪宗)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인가(認可), 혹은 전법(傳法) 혹은 의발전수(衣鉢傳受)라고 한다.
2014년 5월에 나는 “철학의 선물, 선물의 철학:과 ”소리철학 포노로지“를 좀 더 선명하고, 요령 있게 정리한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를 소나무출판사에서 냈다. 그 뒤를 이어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소나무, 2015),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살림, 2017), “네오샤머니즘”(살림, 2018)를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연이어 펴냈다.
심원선생님의 제안과 선생님의 애제자인 최진덕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선으로 “일반성의 철학, 소리의 철학 공개토론회”(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동 3층 소회의실, 2014년 9월 25일 오후 2시∼4시)를 가지는 행운을 철학인류학자의 자격으로 가질 수 있었다. 이날 김형효 선생님과 사모님은 줄곧 경청해주셨다. 이날 연구원 철학전공 교수들과 학생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내가 세계일보 초대평화연구소장으로 재직할 때인 2016년 9월, “평화는 동방으로부터” “평화의 여정으로 본 한국문화”(행복한 에너지, 2016)를 출간하고 신문사에서 출판기념회를 해 주었는데 그 때에도 선생님은 노구를 이끌고 참석하셔서 과분한 축사를 또 해주셨다. 물론 이 책들에도 추천사를 쓰셨지만, 축사까지 해주셨으니 몸 둘 바를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꿈만 같다.
선생님은 추천사를 써주실 때, 처음 몇 권에는 황송하게도 ‘벗 심원(心遠)으로부터’라고 사인을 하셨다. 나이가 10살 정도 차이여서 그랬을까,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심원 김형효’라고 사인해주셨다. 선생님은 항상 ‘박 선생’이라고 불러주셨고, 존대를 하셨다. 선생님은 항상 누구에게도 겸손하셨다.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주신 책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 “평화는 동방으로부터” “평화의 여정으로 본 한국문화”에 이어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살림, 2017)), “네오샤머니즘”(살림, 2018)이 있다. 네오샤머니즘에 써주신 것이 마지막 추천사였다. 2018년 2월 16일 설날아침에 쓰신 것이었다. 그 후 8일 뒤인 2018년 2월 24일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무리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한국철학계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가 쓴 여러 책에 선생님과 함께 추천사를 자주 써 주신 공종원 선생(전 조선일보논설위원)은 김형효 선생님과 서울대 철학과 16기 동기동창으로, 선생님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한다.
“김형효 선생만큼 방대한 저술을 한 서울대 동기가 없어. 학자는 책으로만 말할 수 있는 거야. 세월이 갈수록 남을 수밖에 없어. 제 10회 열암학술상, 제 7회 율곡학술상, 제 19회 서우철학상, 그리고 제 1회 원효학술상을 받았으니까.”
공종원선생은 이어 뒷말을 붙였다. “나도 열암 박종홍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석사학위를 받은 제자로서 집안사정으로 동양방송에 취직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했지만, 김형효선생과 내가 함께 박정진 박사의 신간에 여러 번 추천사를 써준 것은 인연으로 말해도 보통 인연이 아니지.”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학교제자가 아닌데도 김형효 선생님으로부터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랑은 대학이라는 제도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학점과 학위를 주고받는 것과는 다른, 전통적으로 말하면 ‘사숙(私淑)’에 가까운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년은 참으로 고독한 나날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치매증세도 실은 고독의 산물이었지 모른다. 철학적 대화가 되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웠고, 선생님은 ‘유신(維新)철학자’라고까지 주류철학계로부터 매도되는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고독한 섬과 같았다. 나는 만년에 선생님의 고독을 깨운 낯선 이방인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나는 수많은 이야기, 신변잡기에서 고담준론까지, 동서양철학의 핵심부분까지, 그리고 미래의 인류문명에 대한 걱정까지를 자유분방하고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던 것 같다. 2013년 9월 27일부터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직전까지 4년 반 동안 진행된 대담내용은 앞으로 선생님을 증거하기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선생님은 항상 ‘이타적’이셨다. ‘부처님’과 같았다. 선생님은 간혹 철학이 무용하다고까지 말하곤 했다. 말하자면 철학에 관한한 ‘무용(無用)의 용(用)’의 경지에 있었다. 이것은 불교의 ‘무(無)의 유(有)’의 경지와 같다. 선생님은 항상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입장을 견지하셨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생님은 철학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준 분이셨다. 어쩌면 선생님은 나에게 철학 자체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선생님에 대한 도리랄까, 책무랄까, 빚을 갚는 길은 선생님과 4년 반 동안 진행한 대담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최근에 “신체적 존재론”(살림, 2020)과 “서양철학의 종언과 한글철학의 탄생”(yeondoo, 2022)을 펴냈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에서 제시한 <멋(의)-맛(식)-마당(주)-한마당(문화총체)-말(언어)>이 한국문화의 특성을 한글로 체계화한 것이라면 “서양철학의 종언과 한글철학의 탄생”에서 제시한 체계인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한국인의 사유체계를 한글로 체계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에서 철학’으로 나아간 나의 사유의 궤적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철학인류학적 작품이다.
나의 저서에는 반드시 선생님의 각주가 많이 붙어있기에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선생님을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때마다 깨닫게 된다.
“논문이나 저서가 없는 학자는 학자가 아니다.”
제자가 선생님을 떠올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서가에 꽂힌 선생님의 굵직한 저서들을 보면 마음이 부자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진정한 철학은 권력이 아니다.
철학함을 깨우쳐 주신 선승(禪僧)
박정진(문화인류학박사·THINK TANK 2022 정책연구원 소장)
철학이라는 학문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또 철학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은 앎을 위한 것일까?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삶과 함께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두려워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기존의 동서철학의 광범위한 지식을 잘 요약·정리하고 강의를 잘하면 훌륭한 철학자가 되는 것인가. 과연 우리나라에서 철학함을 실천한 철학자는 있었던 것일까. 요컨대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철학이 과연 글로벌시대에도 퇴계철학으로 통용될까. 모르긴 몰라도 중국에서는 주자(朱子)철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퇴계를 칭송하는 것은 은근히 주자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철학에 대해 다층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대학교에 진학해서 경험한 철학이라는 과목은 동서양철학의 내용을 지식으로 익히는 것에 불과하였다. 서양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동양의 공자, 노자, 맹자, 장자, 제자백가….
앞에서 열거한 인물은 철학의 전범을 보여준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을 고스란히 외우고 번역하는 것이 오늘날 철학함은 아니다. 이들의 철학을 잘 아는 것이 철학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점에서 근대한국의 철학자들은 철학함을 실천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혹은 우리말인 한글로 사유하는 습관을 가진 학자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나는 심원(心遠) 김형효(金炯孝)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철학자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선생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철학을 대하는 태도를 훔쳐보면서 마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다. 철학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동안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지식들을 재빨리 재점검하고, 또 그것을 나의 사유로 순간적으로 넘어서면서, 나름대로 내 철학체계를 구축하는 데 열중할 수 있었다.
모처럼 질문다운 질문, 질문이 답이 되고, 답이 질문이 되는 촌철살인 할 것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사유의 단비를 맞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요점을 간략하게 말해주면서도 모자람을 보충이라도 하듯 반문을 해줄 때가 많았다. 아마 그 중에는 제대로 개념을 알고 있는 지를 테스트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구두시험 말이다. 이러한 주고받음은 생각하는 힘을 북돋워주었다.
물론 지식적 측면에서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도 철학공부와 사유훈련을 스스로 해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969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의예과를 거치는 동안 대학도서관에서 문학과 철학 , 그리고 동서양의 고전들을 게걸스럽게 정복해갔던 시절도 있었다. 이때 읽은 책은 헤아릴 수도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차륜 밑에서’, 샤르트르의 ‘말’과 ‘구토’, 까뮈의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스털링 P. 램프레히트의 서양철학사,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등도 즐겨 읽는 책이었다. 경향신문 학술기자로 있던 나에게 강성위(외국어대)교수는 자신이 번역한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상하)를, 임석진(명지대)교수는 자신의 학위논문인 ‘헤겔의 노동의 개념’을 가지고 와서 선물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철학을 해볼 것을 종용했으며, 철학이야기가 통하는 언론인인 나를 즐겨 찾아왔다. 나는 그때를 계기로 철학에 대한 관심을 배가시켰다.
본격적인 철학적 사유에 접어든 것은 영남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부터다. 비교문화, 혹은 비교문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철학의 길로 유혹을 했던 셈이다. 또한 자생인류학의 길을 개척하려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철학적 훈련이었다. 철학적 사유는 모든 학문의 기초로서 필요한 것이었고, 인류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86아시안게임이 벌어질 무렵, 한국의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바람, 말하자면 ‘신(新)실학운동으로서의 인문학’을 주창하는 일군의 소장학자들이 있었다. 철학도 문화적 성숙과 함께 어떤 현실적 필요와 계기를 만나야 구체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시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류학박사과정을 마친 신분으로 여기에 참가했다. 학자들은 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발행하는 『문화와 예술』이라는 잡지(1986∼1988)에 기고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하였다. 나의 예술인류학 정초작업은 이런 계기를 통해 윤곽을 잡아갔다.
당시 나 자신도 모르게 한국문화를 토대로, 혹은 한글개념을 토대로 철학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요컨대 ‘멋’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국문화를 철학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입술소리인 ‘ㅁ’으로 시작되는 <멋(의), 맛(식), 마당(주), 한마당(굿판=문화총체), 말(언어)>을 가지고 한국문화의 의식주의 원형과 문화총체, 그리고 일상생활의 ‘말’까지를 포함하는 문화적 원형을 창출하기도 했다. ‘손’(솜씨, 쓰다, 그리다)이라는 말로 문화적 행위의 원형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작업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 혹은 본능과 결부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단행본으로 처음 묶은 것이 바로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미래문화사, 1990)이라는 책이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의 뒤표지에는 이런 경구가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신(神)이 되고자 했으나, 이제는 신이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시대에 들어왔다. 심정문화, 그것은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신(神)의 복음(福音)이다./지금까지 한국문화는 지극히 극단적으로 억눌린 감정(정사)의 하나인 한(恨)과, 정반대로 지극히 솟아오르는 감정의 하나인 신(神, 神明)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그 중간의 멋(맛)으로 우리 문화를 해석할 때가 되었다./멋은 예술적으로 문화를 고양시키며, 이를 해석하는 순수우리말이다. 멋의, 멋에 의한, 멋을 위한 그러한 멋의 한국문화를 창달하고 해석하는 첫 탐험이 여기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기를…….”
지금 돌이켜 보아도 이 책은 참으로 독창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논리전개상 더러 거칠게 전개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순 우리말(한글)’로 우리문화체계를 정리한 거의 최초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당)사상과 예술인류학’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나는 한국문화예술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함께, 지금 생각하면 마치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것과도 같은, 한국적 존재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내가 주장한 이론은 바로 ‘역동적(力動的, 易動的, 逆動的) 장(場)의 개폐(開閉)이론(DSCO: Dynamic Space-Time, Close and Open)’이라는 것이었다. DSCO이론은 일종의 큰 이론(Grand Theory)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장(場)이라는 것을 의식의 차원에서 말하면, 의식의 열린 상태(O)가 ‘존재’라면 의식의 닫힌 상태(C)가 ‘존재자’가 되는 셈이다. 장(場)은 전자기장(電磁氣場)의 의미와도 통한다는 점에서 현대물리학으로도 확장될 수 있는 거대담론이었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모두 고정불변의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열린-닫힌 상태의 이중적 몸짓, 경계의 운동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떤 체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 머물거나 아니면 그 체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동시에 가진 동물임을 주장하는 저의가 담겨있었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은 세계를 실체로 볼 것이냐, 비실체로 볼 것이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 철학, 예술, 과학, 시 등 문화전반을 다루면서 토착적 담론을 전개했던 것 같다. 그 후에도 나는 직업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수많은 저술을 하면서 지냈다. 지금까지 시집을 포함하여 인문학 저술이 백여 권을 넘는 것을 보면 해마다 3, 4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냈다.
내가 김형효 선생님을 만난 것은 2011년 봄(5월) 무렵이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문화포럼(갤러리 THE FOUR)에서였다. 당시 심원선생님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문화포럼에서 나와서 “사유하는 도덕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도덕경을 강의하면서도 항상 동서비교철학적 안목을 보여주셨고, 철학의 대중화에도 힘을 쏟고 있었다.
신문기자로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 출입기자로서 당시 정문연의 부원장으로 계시던 선생님을 만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철학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인류학자로서 선생님을 만난 것은 ‘인사문화포럼’이 처음이었다.
‘사유하는 도덕경’ 강의는 도덕경의 내용과 서양의 해체철학을 비교하면서 진행되는 강의였다. 동서철학의 유의미한 철학소(哲學素)를 찾아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조명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의 질문과 대답이 활기차게 오고가는 대화의 장이었다.
선생님은 원로철학자로서의 권위는 전혀 내보이지 않았고, 편하게 대화하고 질문할 수 있는 동네할아버지 같은 분위기로 좌중을 압도하는 힘을 보여주셨다. 그러한 자유로운 토론분위기가 그동안 내 속에 쌓여서 잠자고 있던 철학적 힘을, 간헐적으로 여러 저작 속에 분출되었지만, 철학적 체계를 갖추고 드러날 것을 자극했다.
나는 당시 송파구 석촌호수 주변에 살았는데 선생님은 송파구 올림픽 선수촌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관계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토론을 연장할 수 있었다.
심원선생님은 동서철학의 내용을 나름대로 소화하고 정리하고 평가한 20, 30권의 굵직한 철학서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미진했던 철학적 사유들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고,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길렀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선생님과의 대화는 나의 철학적 소양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내가 즐겨 읽은 선생님의 책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평화를 위한 철학”(물결, 1976) “한국사상 산고”(일지사, 1979) “한국정신사의 현재적 인식”(고려원, 1985) “동서철학에 대한 주체적 기록”(고려원, 1985)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89) “가브리엘 마르셀의 구체철학과 여정의 형이상학”(인간사랑, 1990) “베르그송의 철학”(민음사, 1991) “데리다의 해체철학”(민음사, 1993) “메를로-퐁티와 애매성의 철학”(철학과 현실, 1996) “현실에의 철학적 접근”(물결, 1997)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청계, 2001)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청계, 2002) “물학, 심학, 실학”(청계, 2003)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2004) “철학적 사유의 진리에 대하여 1, 2”(청계, 2004) “원효의 대승철학”(소나무, 2006) “철학 나그네”(소나무, 2010) “마음 나그네”(소나무, 2010) “사유 나그네”(소나무, 2010), “마음혁명”(살림, 2010) 등이었다. 그리고 번역서로 “방법서설(김형효 번역)”(사단법인 올재, 2014)이 있다.
나는 선생님의 책들을 삼독사독하면서 스스로 일취월장하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약 1년간의 만남과 소통의 결과로 2012년 1월에, 나는 “철학의 선물, 선물의 철학” “소리의 철학, 포노로지”(소나무, 2012)라는 철학서 2권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출판기념회가 인사동 인사문화포럼(2012년 2월 23일, 갤러리 더포)에서 열렸다. 이때 선생님과 사모님은 출판기념회가 끝나는 이슥한 저녁 무렵까지 함께 머물면서 축하해주셨다. 선생님은 축사를 통해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를 들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다음으로 박정진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고 선생님을 과찬을 해주셨다.
나는 이 책머리에 ‘나는 이 책을 자생철학의 시원을 이룬 김형효 선생님에게 바친다’고 증정을 표했다.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나의 첫 철학책은 시장에서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2014년 봄, 2월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께서 갑자기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사모님이 전화를 해서 선생님을 바꾸어주셨는데 내용인즉 카톨릭 생명윤리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대회(제 10회 정기학술대회)에 제출키로 약속한 논문을 쓰지 못해서 난처한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논문을 대신 쓰고, 발표에 나갈 수 없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순간 무슨 말을 잘못 들었는 것은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사모님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면서 내가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조언이었다. 나는 황송해서 “제가 어떻게 선생님이 발표할 자리에 감히 나가느냐.”고 일단 사양했다. 그런데도 다시 부탁하셔서 부담스럽지만 결국 원고를 쓰기로 했다.
주제는 ‘과학문명시대의 통제와 지배의 대상으로서의 몸’이었다. 이 주제는 과학시대의 시대정신은 물론이고, 이에 적응하는 인간의 몸에 대한 여러 차원의 이론전개가 필요한 것이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나름대로 정리된 체계가 없으면 주제에 부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메를로-퐁티의 신체현상학과 가브리엘 마르셀의 구체철학과 여정의 형이상학을 펼쳐놓고 정독하는 한편 의과대학에 다닐 때의 의학과 생물학 지식을 동원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보름정도 걸려 원고를 마칠 수 있었다. 원고를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는데, 며칠 지나서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원고내용이 좋다고 하면서 바로 주최 측에 제출하도록 주선하셨다.
나는 가톨릭 생명윤리연구소 주최 제 10회 정기학술대회(2014년 3월 15일, 오후 2시∼6시, 카톨릭 대학교 성의교정 성의회관 5층 504호, 주제: 몸의 생명현상과 사회·윤리적 성찰)에 논문을 발표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생님은 너무나 과분한 인정을 해준 셈이었다. 아마도 여기에는 후학들을 격려해주는 선생님의 마음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선종(禪宗)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인가(認可), 혹은 전법(傳法) 혹은 의발전수(衣鉢傳受)라고 한다.
2014년 5월에 나는 “철학의 선물, 선물의 철학:과 ”소리철학 포노로지“를 좀 더 선명하고, 요령 있게 정리한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를 소나무출판사에서 냈다. 그 뒤를 이어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소나무, 2015),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살림, 2017), “네오샤머니즘”(살림, 2018)를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연이어 펴냈다.
심원선생님의 제안과 선생님의 애제자인 최진덕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선으로 “일반성의 철학, 소리의 철학 공개토론회”(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동 3층 소회의실, 2014년 9월 25일 오후 2시∼4시)를 가지는 행운을 철학인류학자의 자격으로 가질 수 있었다. 이날 김형효 선생님과 사모님은 줄곧 경청해주셨다. 이날 연구원 철학전공 교수들과 학생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내가 세계일보 초대평화연구소장으로 재직할 때인 2016년 9월, “평화는 동방으로부터” “평화의 여정으로 본 한국문화”(행복한 에너지, 2016)를 출간하고 신문사에서 출판기념회를 해 주었는데 그 때에도 선생님은 노구를 이끌고 참석하셔서 과분한 축사를 또 해주셨다. 물론 이 책들에도 추천사를 쓰셨지만, 축사까지 해주셨으니 몸 둘 바를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꿈만 같다.
선생님은 추천사를 써주실 때, 처음 몇 권에는 황송하게도 ‘벗 심원(心遠)으로부터’라고 사인을 하셨다. 나이가 10살 정도 차이여서 그랬을까,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심원 김형효’라고 사인해주셨다. 선생님은 항상 ‘박 선생’이라고 불러주셨고, 존대를 하셨다. 선생님은 항상 누구에게도 겸손하셨다.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주신 책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 “평화는 동방으로부터” “평화의 여정으로 본 한국문화”에 이어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살림, 2017)), “네오샤머니즘”(살림, 2018)이 있다. 네오샤머니즘에 써주신 것이 마지막 추천사였다. 2018년 2월 16일 설날아침에 쓰신 것이었다. 그 후 8일 뒤인 2018년 2월 24일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무리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한국철학계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가 쓴 여러 책에 선생님과 함께 추천사를 자주 써 주신 공종원 선생(전 조선일보논설위원)은 김형효 선생님과 서울대 철학과 16기 동기동창으로, 선생님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한다.
“김형효 선생만큼 방대한 저술을 한 서울대 동기가 없어. 학자는 책으로만 말할 수 있는 거야. 세월이 갈수록 남을 수밖에 없어. 제 10회 열암학술상, 제 7회 율곡학술상, 제 19회 서우철학상, 그리고 제 1회 원효학술상을 받았으니까.”
공종원선생은 이어 뒷말을 붙였다. “나도 열암 박종홍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석사학위를 받은 제자로서 집안사정으로 동양방송에 취직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했지만, 김형효선생과 내가 함께 박정진 박사의 신간에 여러 번 추천사를 써준 것은 인연으로 말해도 보통 인연이 아니지.”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학교제자가 아닌데도 김형효 선생님으로부터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랑은 대학이라는 제도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학점과 학위를 주고받는 것과는 다른, 전통적으로 말하면 ‘사숙(私淑)’에 가까운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년은 참으로 고독한 나날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치매증세도 실은 고독의 산물이었지 모른다. 철학적 대화가 되는 상대를 만나기 어려웠고, 선생님은 ‘유신(維新)철학자’라고까지 주류철학계로부터 매도되는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고독한 섬과 같았다. 나는 만년에 선생님의 고독을 깨운 낯선 이방인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나는 수많은 이야기, 신변잡기에서 고담준론까지, 동서양철학의 핵심부분까지, 그리고 미래의 인류문명에 대한 걱정까지를 자유분방하고 허심탄회하게 나누었던 것 같다. 2013년 9월 27일부터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직전까지 4년 반 동안 진행된 대담내용은 앞으로 선생님을 증거하기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선생님은 항상 ‘이타적’이셨다. ‘부처님’과 같았다. 선생님은 간혹 철학이 무용하다고까지 말하곤 했다. 말하자면 철학에 관한한 ‘무용(無用)의 용(用)’의 경지에 있었다. 이것은 불교의 ‘무(無)의 유(有)’의 경지와 같다. 선생님은 항상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입장을 견지하셨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생님은 철학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준 분이셨다. 어쩌면 선생님은 나에게 철학 자체였다. 이제 나에게 남은 선생님에 대한 도리랄까, 책무랄까, 빚을 갚는 길은 선생님과 4년 반 동안 진행한 대담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최근에 “신체적 존재론”(살림, 2020)과 “서양철학의 종언과 한글철학의 탄생”(yeondoo, 2022)을 펴냈다.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에서 제시한 <멋(의)-맛(식)-마당(주)-한마당(문화총체)-말(언어)>이 한국문화의 특성을 한글로 체계화한 것이라면 “서양철학의 종언과 한글철학의 탄생”에서 제시한 체계인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한국인의 사유체계를 한글로 체계화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에서 철학’으로 나아간 나의 사유의 궤적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철학인류학적 작품이다.
나의 저서에는 반드시 선생님의 각주가 많이 붙어있기에 새로운 글을 쓸 때마다 선생님을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때마다 깨닫게 된다.
“논문이나 저서가 없는 학자는 학자가 아니다.”
제자가 선생님을 떠올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서가에 꽂힌 선생님의 굵직한 저서들을 보면 마음이 부자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진정한 철학은 권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