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동기 동창들과 김형효 : 공종원(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철학과 동기 동창들과 김형효


                                              공종원(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나는 1958년 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김형효군을 처음 만났다. 마산출신으로 서울에 처음 올라온 사람치곤 경상도 사투리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고 대신 목소리가 맑고 우렁차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 철학과의 입학동기생들은 모두 25명이었는데 너무 개성이 강하고 자기주장도 강한 때문인지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는 기억은 없었지만 졸업 후엔 오히려 그런대로 자주 만나서 학창 때의 서먹함을 해소하려는 듯한 노력을 했다는 느낌이다. 물론 졸업 후에도 별로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자기생활에 전념한 동창들이 적지 않았음은 인정할 밖에 없다.

  모임에 자주 참가한 동창은 김기팔(드라마 작가), 임상원(고려대 신방과), 이남영(서울대 철학과), 디오게네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정상렬(건설업), 정호용(부산대), 신향식(민주화운동), 이창복(민주화운동), 홍성현(목사), 공종원 등이었으며 여러 이유로 거의 참여하지 않은 동창은 신오현(경북대). 신구현(영남대) 임종규(목포대), 하일민(부산대), 오명호(재독 경영학), 이창균(북한), 전광일(재미 목사), 유택상(재미 사업) 윤형진(재미 사업), 오태환(재 스웨덴), 류훈길(사업), 김태영(경희대 사학)등이었다. 김형효군은 초기에 몇 번 참여했으나 뒤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고 기억된다.

 세월이 가면서 동창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이도 생기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모임자체도 부실해진 때문이기도 했지만 김군 자신의 생각이 모임참여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듯 싶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이제 시간도 별로 없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모임으로 아까운 시간을 빼앗기기 싫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해야 할 공부가 많은데 헛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취지의 말이었다고 기억된다.      

  김박사의 근년 학적 탐구 생활도 아주 철저했다는 것이 친구들의 전언이었지만 학창시절에도 그는 대단한 공부벌레였다. 전공 공부는 논외로 하고 어학공부만 국한해도 철학과생이 알아야하는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이외에 프랑스어와 라틴까지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것은 동창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일이었다. 아마도 이런 기초 작업이 있었기에 그는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입학했으나 일찍이 벨기에 루뱅대로 유학길에 올라 석·박사통합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는 가톨릭계 장학금으로 유학하여 무사히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취임한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겨 그의 학구적 관심의 폭을 더욱 넓혀갔던 것 같다.

  그 즈음인가 나는 도봉산 등산에서 돌아내려오던 길에서 우연히 김박사를 만나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선사의 석불 앞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부처님에 참배하는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대학시절에 친구 간에 자신의 종교를 내세워 한창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는 기억으로 잠시 당황할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김박사가 독실한 불자인 어머님을 따라와 참배 길에 나섰다는 자체가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김박사의 학문적 깊이가 이제 불교철학에까지 확대되고 있었다는데 대해 크게 고무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김박사는 본격적으로 불교철학의 강의에도 나서고 심지어 도가의 노자 도덕경까지 강론하는 학문적 온축을 드러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모친이 택했던 것처럼 불교에 귀의하고 그 토대 위에서 동서양사상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동창의 한사람으로 너무 아쉬울 뿐이다.